(불턱)마스크의 일상들 - 작가 김진숙님 기고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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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조회 690회 작성일 20-06-29 08:16본문
<평화나무>
마스크의 일상들
김진숙 제주작가회의
오월의 마지막 주, 마스크를 쓴 아이들이 교실로 들어옵니다. 입학식도 치르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어서와, 고등학교는 처음이지?’ 환영의 문구도 적어 보았습니다. 처음으로 시행된 온라인 수업에 지친 아이들과 교사들의 눈빛은 설렘과 기대감으로 반짝입니다. 물론 다시 또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을 두고 두려움은 여전히 공존합니다. 마스크를 쓰고 오고 가는 대화는 눈과 귀를 여는 일입니다. 자세히 보게 되었고 흘려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마스크를 쓴 채 수업을 하고 말을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입안 가득 밀려오는 더운 입김과 그 안에서 맴도는 말의 파편들. 가장 최전선에서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현장의 의사들과 간호사들의 고충을 조금이나마 공감하고 체감하게 되는 지점입니다. 유일하게 아이들의 전신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은 급식시간. 마스크 안에 꼭꼭 숨어있던 아이들의 맑은 얼굴이 그저 반갑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아무런 장벽 없이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소하고 행복한 일인지 큰 대가를 치르고 알게 되었습니다.
# 봄의 비가(悲歌)
활짝 피어난 봄꽃들은 죽은 이들에게 바치는 것이고, 푸른 잎은 추모사이다. 봄날의 우렛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파도 소리는 죽은 이들과 생존자인 우리를 위한 비가(悲歌)이다. 2020년의 봄은 창백하다. 이 봄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중국 출신의 시인 톈위안의 <봄은 장례식이다>는 기고문에서 가져온 문장입니다. 어김없이 봄은 왔고 꽃은 피었으나 죽음의 그림자만이 가득했던 봄. 바이러스가 처음 발생한 중국의 우한을 잘 알고 있던 그는 TV를 통해 미처 슬퍼할 겨를도 없이 가족과 친구들이 장의차에 실려 화장터로 옮겨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아이들로 보이는 세 구의 시체가 한 부대에 담기는 봄을 보내며 모든 비극은 인간 행동의 산물이라고 말합니다.
지난 3월 11일, 세계보건기구는 코로나19를 세계적 대유행(펜데믹)으로 선언했습니다. 소리 없이 침투하여 목숨까지 위협하는 상황은 마치 전쟁과도 같습니다. 심지어 전쟁에서 사망한 숫자보다도 바이러스로 인한 사망이 훨씬 많다고 하니 어느 나라든 두려운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우리의 일상을 낯설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방역의 모범이라고 불리며 전 세계적인 관심 속에서 우리는 방역지침을 준수하고자 부단히도 노력해 왔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감염 경로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유럽국가들의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방역지침은 많은 공감과 지지를 얻었습니다. 나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생각이 더욱 지배적이니까요. 사회적 거리 두기 지침으로 일상의 만남이 취소되고 연기되면서 경제적, 정신적인 피해도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단절과 거리두기, 생산성 저하와 동력의 상실이 지구의 환경을 정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T.S. 엘리어트는 <황무지>라는 시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습니다. 4월이면 자주 인용되는 시 구절이 발표된 것은 1922년입니다. 1918년 1차 세계대전 끝 무렵부터 스페인 독감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고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코로나19처럼 말입니다. 하여 전쟁의 폐허 위에 다시 뒤덮은 죽음의 그림자를 엘리어트는 그렇게 표현했다고 합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우리나라에서도 ‘무오년 독감’이라 불렸던 스페인 독감으로 14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당시 조선인 1,678만3,510명 중 절반에 가까운 742만2,113명(44%)이 감염되어 13만9,128명(전체 감염자의 1.87%, 전체인구의 0.83%)이 희생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로도 에볼라, 에이즈, 뎅기열, 메르스, 사스 바이러스 등등 수많은 바이러스가 발생했으며 앞으로 우리는 신종 바이러스의 공격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거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후의 과제는 명백해집니다.
# 임을 위한 행진곡
오월이면 가슴이 뜨거워지는 노래입니다. 광주항쟁 40년, 오월 문학제를 다녀왔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6월로 미뤄진 행사입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많이 방문한 도시가 광주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자유와 민주를 그곳에 빚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1980년 5·18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으로 245개의 총탄 흔적이 남아 있는 곳, 새롭게 단장한 전일빌딩 전망대에 올라 금남로 도청 앞 광장을 바라보았습니다. 무자비했던 진압의 새벽을 깨웠던 그녀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주먹밥을 만들던 시장통 아주머니부터 마지막까지 도청을 떠나지 않았던 여학생까지 광주의 시민들이 지키고자 했던 민주의 함성을 아프게 들었습니다. 또한 광주 학살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치다 푸르디 푸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청년 열사들을 생각합니다.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실 박종철 열사를 생각합니다. 이십 대의 두 아들을 둔 부모가 되고 보니 새로운 감정이 솟아납니다. ‘내 아이보다 더 어린 청년을 그렇게 고문했구나’하는 분노의 감정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잊을 수 없는 기억들.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의 기억으로부터 우리는 여전히 자유롭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슬픔의 기억은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고요. 그러나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는 거대한 폭력 앞에서 분명 빨리 잊고 싶은 것은 가해자의 문법입니다. 수많은 피해자가 존재하는데 가해자는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아직도 역사를 왜곡하고 가해자의 편에 서서 옹호하고자 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용서란 용서를 구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하셨던 강정의 신부님이 생각납니다. 아픔과 고통의 기억을 치유하지 않고 잊을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역사적 정의를 실현할 때까지 끝까지 싸우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하여 기억도 투쟁이, 단단한 연대가 필요합니다.
# 정의기억연대를 응원합니다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 중에 가장 유명한 작품은 <게르니카>입니다. 죽은 아이의 시체를 안고 절규하는 여인, 표정 없는 황소의 머리, 부러진 칼을 쥐고 쓰러진 병사, 광기에 울부짖는 말, 램프를 들고 쳐다보는 여인, 여자들의 절규, 분해된 시신 등을 통해 보여준 메시지는 ‘전쟁은 사람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스페인 내전이 한참이던 1937년, 나치는 스페인 북부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를 폭격합니다. 이를 알리기 위해 피카소는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게르니카를 그렸습니다. 그림을 본 나치의 한 장교가 피카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그린 작품이오?”
”아니요, 당신들이 그렸지.“
피카소의 대답이 통괘하고 시원합니다. 바로 일본 정부가 그렇습니다. 잘못된 역사가 그려낸 끔찍한 그림을 반성하지 않습니다.
1973년 일본 마이니치신문 기자 출신 언론인 센다 가코가 『목소리 없는 여성 8만 명의 종군위안부』를 발간했고, 한국 사회에서도 80년대에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의 단체가 설립되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했습니다.
"처음엔 일본군을 피해 도망가면 기어코 쫓아와 울면서 당하곤 했어요. 그때 나이 열일곱이었죠." "제가 자랑스러울 것 하나 없는 과거사를 들추고 나선 게 돈 몇 푼 더 받기 위해서였겠습니까? 일본에서 국민기금을 모아 올 정도로 성의를 보였으면 대충 마무리 지을 만한데 뭘 자꾸 버티느냐는 식의 일본 쪽 시각을 정말 참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일본 정부의 법적 배상금이지 위로금이 아닙니다."
김학순 할머니를 시작으로 피해당사자들의 증언으로 사회적 공론화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후 30년 동안 피해자 할머니들과 함께 걸어온 여성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마음을 보탰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여기까지 왔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1992년 1월 8일 1차 수요집회를 시작으로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그런 노력을 알기에 작은 마음이나마 보태려 합니다. 생존자 복지 지원, 연구조사 교육사업, 국내외 연대 사업 등 역사적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업 또한 진행해왔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소녀상이 훼손되는 사례를 가끔 접하게 됩니다.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 이후 보여준 보수언론의 무차별적인 공격과 왜곡 보도는 그 불순한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많은 상처를 남겼으나 다시 수요집회에 나가겠다는 이용수 할머니의 보도를 들을 수 있어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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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평화나무 원고 김진숙.hwp (19.0K) 15회 다운로드 | DATE : 2020-06-29 08:2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