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해자 및 조력자에 대한 2차 피해 문제 _ 무엇도 ‘진실’을 왜곡할 수는 없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
그간 우리 사회는 성폭력에 대한 말하기를 염두에도 못 두게 하거나, 멈추게 하기 위해 자행된 수많은 2차 피해를 야기하는 행위와 싸워왔습니다. 피해자의 말을 왜곡 없이 잘 듣는 것, 여기에서 문제 해결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2018년 #미투운동이 들불같이 퍼질 때,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 사회가 이전보다 피해자의 말을 잘 ‘들을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기도 했습니다. #미투운동의 힘으로 2018년 말 2차 피해 방지를 위한 국가와 지자체의 책무를 담은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이 제정되기도 했습니다.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은 2차 피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첫째, 수사·재판·보호·진료·언론보도 등 여성폭력 사건처리 및 회복의 전 과정에서 입는 정신적·신체적·경제적 피해, 둘째, 집단 따돌림, 폭행 또는 폭언, 그 밖에 정신적·신체적 손상을 가져오는 행위로 인한 피해(정보통신망을 이용한 행위로 인한 피해 포함), 셋째, 사용자로부터 폭력 피해 신고 등을 이유로 입은 각종 불이익조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박원순 전 시장 사망 이후 법률에서 나열한 2차 피해가 한꺼번에 발생하는 상황을 목도했습니다. 2차 피해에 대해서 짚는 것은 성폭력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향해, 책임을 밝히는 과정을 위해, 재발 방지를 설계하기 위해 현재 상황에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2차 피해 문제가 중요하게 인지될 때, 이에 대한 대책이 구체적으로 마련되고 경감될 때 우리는 진상의 규명과 향후 과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먼저, 서울시와 관련해 발생한 2차 피해입니다.
첫째, 기관장으로 치러진 장례에 대해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인이 성추행으로 피소된 것은 명백한 사실인데, 사건에 대한 명확한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수십만 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규모의 장례위원이 주도하는 기관장으로 치러진 장례는 피해자에게 피고소인의 위력을 다시 한번 확인시킴으로써 피해자를 위축시켰습니다.
둘째, 역대 비서실장들은 "시장실에서 근무하는 동안 시장과 고소인 사이에 이상한 낌새를 감지하지 못했다"고 입을 모았다고 합니다. 비서실장은 비서실 직원들을 관리, 감독할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정말 ‘낌새’를 감지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비서실의 책임자로서 직원에게 4년간 지속된 성적 괴롭힘을 몰랐다는 것은 문제입니다. 또한 피해자가 고소를 통해 정당한 사법 절차를 밟고 있는 상황에서 섣불리 몰랐다고 얘기하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고, 아직 다 말해지지 못한 피해자의 진술을 미리 부정하겠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셋째, 지금 피해자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피해자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댓글이 아닙니다. 지난 4년간 헌신적으로 일했던 조직과 이 사건에 대해서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었던 20여 명에 달하는 동료들이 이 사건을 은폐, 왜곡, 축소하는 데 가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울시 관련자들의 은폐, 왜곡 행태를 지켜보며 더욱 명확해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본 사건이 박원순 전 시장의 개인적 문제를 넘어 권력에 의해 은폐, 비호, 지속된 조직적 범죄라는 사실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피해자와 변호인, 지원단체에 대한 비난과 공격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왜 4년 동안 침묵하다가 이제야 고소했는가, 여성단체나 변호인이 부추겼다, 죽음에 책임져라, 언론플레이한다,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
2차 피해와 싸우는 일은 성폭력과 싸우는 일이고, 성폭력과 맞서는 일은 2차 피해에 맞서는 일이었음을 여성폭력 피해 지원 단체들은 지난 30년간 절감해 왔습니다.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의 반복되는 내용을 보며 수많은 여성시민들이 분노와 좌절을 느끼고 있습니다. 피해자와 변호인, 지원단체에 대한 비난이 왜 문제인지 짚고자 합니다.
첫째, 피해자는 소극적, 적극적인 방식을 통해 4년간 꾸준히 이야기해왔고, 부서를 이동시켜줄 것도 여러 차례 요구했습니다. 4년간 그 이야기와 요구를 듣고도 제대로 응답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둘째, 여성단체나 변호인에 의해 부추겨졌다는 것은 피해자를 비자발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로 치부하는 것으로 이 자체로 피해자의 인격권, 존엄성을 침해하는 행위입니다. 피해자는 변호인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 요인을 검토하여 변호인을 선택했으며, 단체의 지원 여부도 본인의 의사에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피해자 변호인과 지원단체는 모든 건에 대해서 피해자와 상의하고 있으며, 상의된 범위 내에서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셋째, 변호인은 피해자를 대리하는 사람입니다. 변호인에 대한 공격은 곧 피해자에 대한 공격입니다. 변호인에게 피고소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넷째, 피해자는 정당한 사법절차를 통해 피해사실을 인정받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피고소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사법절차를 제대로 밟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그리고 피해사실이 조직적으로 은폐될 상황에서 피해자는 어떤 방식으로 피해사실을 말하고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그 절차를 훼손하고자 하는 것이 누구인지 묻지 않은 채 피해자와 지원단체에게 ‘폭로’하고, ‘언론플레이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본질을 호도하는 것입니다. 피해자의 말하기의 통로를 차단하고 ‘언론플레이’와 ‘폭로’로 둔갑시킨 것은 누구입니까.
다섯째, 본 단체들이 이 사건을 지원하는 이유는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본 사건의 진실이 규명되어 피해자가 일상으로 안전하게 복귀하는 것, 그리고 본 사건의 제대로 된 해결을 통해 직장 내에서 여성들이 대상화, 도구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우리가 구축해온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비난과 위협이 있다 해도 흔들리지 않을 사실입니다.
이 모든 비난이 향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 피해자와 변호인, 지원단체 흠집내기를 통해 피해자의 입을 막고, 진실을 부정하고, 피고소인과 관련자들을 비호하려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구합니다.
첫째, 서울시 관련자들은 수사와 조사에 성실히 임해야 합니다.
둘째, 수사기관은 관련자들을 제대로 수사하고, 책임 있는 자들에게 응당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셋째,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여성폭력방지기본법에 의거 2차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을 제출하고, 집행해야 합니다.